Page 4 - 하우인 2022년 4월호 - (주)하우엔지니어링 웹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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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22 APRIL
대의 정치의 제일 목표는 백성들의
삶의 질을 개선하기 보다는 세습
양반들에 의한 항구적인 체제 안정
이었던 것이다.
,
부산 교역시대의 중심
부산은 성곽 시대에는 한가한 어
촌에 지나지 않을 뿐 별로 존재감
이 없었다 삼포개항(1426) 이래
.
,
일본과의 교역 임진왜란 이후 초량
▲ 그림2. 1903 부산항 지도 경부선철도(1904) 개통 전)
(
왜관의 개설(1678) 이 있었지만 농
,
(
이 착평공사로 사라졌고 이때 나온 버럭 흙과
경시대를 교역시대로 전환하기에는 여전히 역부
,
돌 으로 매립한 땅으로 새마당이 조성되고 부산
)
’
.
‘
역 부지가 되었다. 족이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근대 개항 으로 불
리는 부산포 개항(1876) 이었다.
물론 부산포 개항은 절로 이뤄진 게 아니다 그
.
,
동래 성곽시대의 중심
,
뿌리는 길게는 삼포왜관(1426) 개항 이후 무려
450 여 년 유지된 왜관 초량왜관 시대 포함 이라
(
)
동래부는 동래읍성이 행정치소였고 동래부사가
.
수령이었다 성곽시대는 곧 자급자족 농경시대 할 수 있다 부산항이 활성화되고 경부선 철도
.
이기도 하다 조세는 농사에서 거둔 농작물 즉 (1904) 가 개통됨으로써 도시의 중심은 동래에서
,
,
부산으로 옮겨갔던 것이다.
조세미가 주종이었다. ‘ 농자천하지대본(農者天
,
下之大本 )’ 이란 말이 있듯이 농사가 잘 되어야
,
동래의 다리 부산의 교량
.
백성들의 삶이 평안했다 지방수령의 책무인 수
*)
령칠사(首領七事 중에서도 제일의 책무가 농
)
川
.
상성(農桑盛 ) 으로 농사와 양잠(養蠶 ) 에 힘쓰는 강은 배가 다닐 수 있어야 강이다 시내( ) 는
대개 강의 지류를 말한다 수심이 얕은 시냇물에
.
.
일이었다 또한 사농공상(士農工商 ) 이라는 신분
.
서는 징검다리 또는 섶다리가 대부분이었다 섶
적 위계를 중시하여 상업을 천시했다 즉 조선시
.
다리는 나무다리로써 하천 바닥에 나무말뚝을
*) 수령칠사는 농상성(農桑盛 )· 호구증(戶口增 )· 학교흥(學 박은 뒤 말뚝 상부에 들보를 얹듯 얽어맨 뒤에
校興 )· 군정수(軍政修 ) 부역균(賦役均 )· 사송간(詞訟
簡 )· 간활식(奸猾息 ) 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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