Page 7 - 하우인 2024년 6월호 - (주)하우엔지니어링 웹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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■■■ HOWIN 건설기행
과 목책성 위주였다.
다음으로 곧잘 하는 오해는 중세에 성벽을 쌓
을 때 콘크리트를 사용하지 않았다?. 정답은 콘
,
크리트를 사용했다 기원 전후 로마의 콜로세움
.
도 판테온 신전도 로만시멘트(Roman Cement)
,
를 사용했다. 20 세기에 진입한 이후 석회석을
,
▲ 그림9. 라크베르 성의 안뜰 고온에서 소성함으로써 분말도 높은 시멘트 즉
’
‘ 포틀랜드 시멘트 가 등장했다는 점이다.
다음으로 성채 높이는 고대에도 아득히 높았다
는 오해이다 기원전 만리장성의 토성 높이는
.
,
말이 뛰어넘지 못할 정도의 높이였다 그러다가
.
서서히 높이 경쟁으로 높아졌다가 15 세기 대포
가 발명됨으로써 높이는 낮아지는 대신 두께가
,
.
▲ 그림10 주교좌 성채 합살루 안뜰 두꺼워졌던 것이다.
.
’
‘
중세 시대는 성채 시대 라고 할 수 있다 중세 탈린의 매력
유럽의 성채의 주인은 왕국의 왕일 수도 있고,
카톨릭 대주교일 수도 있다 또한 비록 규모는 탈린은 중세와 현대가
.
,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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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지만 봉건 제후의 성채일 수도 있다 에스토 50:50 으로 조화를 이룬
니아에서 답사한 성채로는 탈린의 구도심 성채, 도시 뿐만 문명과 자연
,
인근 도시 합살루의 대주교좌 성채 그리고 라크 도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
,
.
,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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베르 성 등이었다 이쯤에서 중세 유럽의 성채에 다 이른 아침 도심을 관
대한 일반인의 오해도 풀어주고 싶다. 통하는 애마 강 상류로
우선 첫 번째 오해가 서양의 성채는 아득한 조깅을 나섰다. 도중에 ▲ 그림11. 에마 강의
낚시꾼
고대에도 석재로 쌓았을 거라는 점이다 정답부 낚시하는 노인을 만나 함
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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터 말하자면 고대에는 토성 또는 목책성이었다. 께 사진을 찍었다 자세히 보니 미끼는 꼬물거리
,
,
이는 중국의 만리장성도 진시황 때부터 석재로 는 구더기였다 탈린 토박이라 서로 말은 통하지
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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쌓았다고 오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채의 건 않았지만 눈짓 손짓으로 통했다 비록 탈린에서
,
축 재료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, 는 이틀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탈린의 매력을 온몸
,
,
동서양을 막론하고 개략 10 세기 이전에는 토성 으로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.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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