Page 8 - 하우인 2022년 5월호 - (주)하우엔지니어링 웹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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▲ 그림2. 평양성 지도 2-1. 모란봉지구 조감도 출처 민족21)
의선 철도 개설과 함께 큰 변화를 겪는다. 대동강의 다리들
성곽도시일 때는 성곽 안 지역 즉 내성과 중성
,
이 중심이었다면, 1905 년 경의선 개설과 함께
.
평양역이 도시의 중심이 되었다 대동강 위에 대
동강철교가 가설되었고 평양역을 중심으로 소
,
위 역세권이 개발된다 이후 평양역과의 연계 교
.
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1923 년 대동강 위에
최초의 인도교인 대동교도 개통한다.
(
대동강은 평양의 젖줄이기도 하지만 평양 사람 ▲ 그림3. 평양관부도 평양속지 1730) - 영제교와 보통교
들의 뱃길 이동로이자 여흥의 무대이기도 하다.
대동강 위에는 어떤 다리들이 놓여있었을까?
여흥의 무대는 곧 선유(船遊 )’ 로써 대동강 뱃놀
‘
우선 조선시대 평양의 고지도를 통해 대동강에 놓
이를 말한다 이 대동강 뱃길을 이용하여 평안감
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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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
>
여 있던 다리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. 그림 에
,
사가 평안도 감영에 부임을 했고 중국을 오가던
표기된 바와 같이 좌측 하단 대동강 지류인 무진
연행 사절도 한양을 오가던 중국 사신들도 예외
,
천에 놓인 영제교와 지도 중앙 상단에 보통문 밖
.
없이 뱃길을 이용했다 그렇다고 조선시대에 대
V
(
보통강에 놓인 보통교 표시 가 보인다 이 두
.
)
동강에 교량이 전혀 없었던 것은
교량은 한양과 의주로 통하는 의주대로 상의 중
아니었다 나루터와 뱃길에 지장이 되지 않는 곳
.
,
요한 거점이었기에 표기해 놓았던 것이고 다른
에 다양한 다리들이 있었다 물론 수심이 얕은
.
교량들은 생략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증거로
.
,
,
곳 물살이 느린 곳 즉 대동강 본류가 아닌 지류
다음에 신증동국여지승람(1530) 을 인용한다.
쪽에 다리들이 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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